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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슐리외급 전함 장 바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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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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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orldofwarships.eu/en/news/history/jean-bart-jean/

 

배경

 

때는 1940년, 유럽의 프랑스 육군이, 파리를 향한 가차없는 독일 육군의 진격에 빠르게 패전을 거듭할때였습니다. 6월,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의 항복 조건의 초안을 작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프랑스 함대는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현대화된 함대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독일의 손에 떨어지면, 연합국에겐 거대한 위협이 될수 있엇습니다.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 프랑수아 다를랑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처칠에게 그가 지난 몇년동안 현대화 하고 건조에 힘을 쓴 함대를 적국에 손에 넘어가게 하지않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다를랑의 함선 건조 계획은 1930년대 당시 많은 군사 강국이 각각 적용하는 접근 방식을 여러 방식으로 반영해왔습니다.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포켓 전함"이나, "비토리오 베테노급"등의 전함들에 대응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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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슐리외, 1943년 뉴욕

 

리슐리외급은 이러한 프랑스의 반응 중 하나였습니다. 이 신예 전함은 이전의 덩케르크급 전함과 많은 디자인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1920~30년대의 HMS 넬슨과 같은 영국의 건조 개념에서 영향을받은) 모든 주포가 전방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함포들은 프랑스 전함 디자인의 필수가 된것처럼, 4문의 380mm 4연장 함포 2기를 장비하고 있습니다. 적은 포탑에 많은 포문을 갖는 것은, 함포를 보호하기 위한 장갑이 더 적게 필요해지며 중량이 줄어들고,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것을 의미했습니다.

 

적은 포탑은 안타깝게도, 적은 수의 피격탄으로도 포탑이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프랑스 기술자들은 신중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2개의 포탑 사이에 충분한 공간을 두고 상부구조물을 최대한 함미 쪽으로 이동하며, 각 포탑을 내부적으로 구획을 나뉘어 피해 확산을 최소화했습니다. 부포의 대부분은 델타 모양으로 배치된 3개의 152mm 함포로 구성되어있으며, 함미에 배치되었습니다. 장갑과 무장을 희생하지 않고 고속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실제 최대 속도가 32노트로 리슐리외급은 아이오와급 전함 다음으로 가장 빠른 전함 중 하나였습니다.

 

 

싸울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

 

프랑스 17세기의 유명한 사략선 선장의 이름을 딴 장 바르는, 리슐리외급 전함의 2번함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1936년 후반에 생나제르에서 건조가 시작되었지만, 프랑스가 1940년 6월 중순, 항복할 때 3/4 정도 완성되어있었고, 2기의 포탑중 1기만 작동이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장바르는, 자매함인 리슐리외와 상당 부분의 해병대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아프리카의 식민지로 피신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함선이 이동하는 동안, 프랑스 국가는 프랑스 남부지역 (비시에 수도를 둔) 에 독일의 종속국으로써 반독립적으로 유지되며, 전쟁 중 중립국이 되도록 하는 휴전이 체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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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함선들은 주로 영국에서 연합국의 자유 프랑스 해군의 소속으로 작전했지만, 장바르와 대부분의 프랑스 함선들은 비시 정부의 지휘하에 있었으며 식민지에서의 중립성을 지키기위해 집중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과 영국 둘 다 프랑스와 그들의 충성심에 불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비시 정부 요인이었던 프랑시스 다를랑은, 1940년 7월 메르스 엘 케비르에서 영국해군에 의한 공격 이후, 영국에 대해 큰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장바르는 6월 22일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도착했고, 항구에 방어용도로 계류되었다. 많은 중무장 대공포가 도시를 요새화하기 위해 철거되었으며, 건조에 필요한 자원은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 항해장비와 사격 통제장비가 카사블랑카에 수송되기까지는 거의 1년이 걸렸습니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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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의 장바르. 좌현에 방뢰 그물이 보인다.

 

 

 

횃불 작전

 

장바르는 여전히 미완성 상태로 인해 해군에 공식적으로 취역하지는 않았지만, 1942년 11월에 주목할만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연합군 사령부는 자유 프랑스군과 함께 북아프리카 침공 작전 수행 계획 (횃불 작전)을 세워왔고, 비록 미국 외교관들이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 지도자들과 협상을 해왔지만, 그들의 확답은 확보되지 않았고, 연합국 점령에 대한 그들의 잠재적 대응방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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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카사블랑카에 침공함대가 접근함에 따라, 해안 방어용 포가 상륙군에 발사되었고, 미국의 호위 함선들이 이에 대응하였습니다. 프랑스 방어군은 9척의 구축함, 1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11척의 잠수함들을 장바르 옆에 계류시켰고, 3척의 해안포가 이를 지원하였습니다. 미 해군의 포격에 의해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않은 함선과 잠수함들은 침공군에게 어뢰 및 소구경 함포로 참공군을 제지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했지만 거의 소용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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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당시의 카사블랑카 항구. 장바르가 왼쪽에 식별된다

 

 

여전히 항구에 계류 중이던 장바르는 유일하게 작동하던 포탑에서 몇 발의 포탄을 발사하며 교전을 시작했습니다. 메사추세츠의 함포들과 이어서 USS 레인저의 급강하 폭격기가 함선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항공포탄은 장바르에게 가벼운 피해를 주었지만, 메사추세츠가 발사한 포탄이 몇몇 명중탄을 기록했고, 첫 번째 명중탄은 작동 불능인 포탑에 명중하여 내부에서 폭발했지만, 다행히 유폭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406mm 명중탄은 유일하게 작동하던 함포에 명중해 포탑 회전 기능을 고장 내며, 일시적으로 포탑을 침묵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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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메사추세츠

 

 

포탑 회전 기능은 재빨리 고쳐졌고, 이틀 뒤 장바르의 함포는 연합국 호위 함대와 USS 오거스타를 거의 명중시킬뻔하면서 다시 한번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오거스타에 있었던 리차드 벨트 미해군 소위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쾅! 쾅! 장바르의 15인치 함포가 13,000야드의 거리에서 2번의 일제사를 날렸다. 함선 맨 위에 있는 사람들은 노란색 염료의 파편이 심지어 물 위 130피트 위까지 도달했다고 말했다. 당연히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우리의 치즈 박스 장갑은 15인치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우리가 대응해야 할 것은 구축함, 6인치 순양함 함포, 6인치 해안포가 될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중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15인치 철갑탄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불안해졌다. 화요일 아침은 정말 대단했다"



이는 USS 레인저의 급강하 폭격기들로부터 심각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폭격기들은 장 바르가 얕은 항구에서 침몰할 수 있도록 두 번의 명중 (앞, 뒤)탄을 냈습니다. 격렬한 협상의 결론이 난 다음날,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 최고위급 장교로써, 프랑수아 다를랑은 연합군 사령부로 편을 바꾸고, 그들의 대의에 동참하는 합의를 맺었습니다. 이것이 카사블랑카 전투를 효과적으로 맺음 지었고, 이에 대해 리차드벨트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카사블랑카를 폭격하기 위해 나설지, 친구로 남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모든 것은 거물들의 협상 결과에 달려있었다 [...] 그리고 우리의 제독은 다시 함선에 올라탔고 우리가 친구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목요일 정오에 우리는 카사블랑카 항구의 닻을 올렸다. 우리의 으스스 한 모습은 우리가 목격한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죽은 군인들과 선원들이 물에 떠다니고, 프랑스 해군의 좌초되고, 불타고, 그리고 침몰된 구축함과 순양함, 그리고 폭격을 받은 장바르 등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당연히 상선들은 함포로 난파당하거나 자신들의 손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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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전투 이후의 장바르.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선명히 볼 수 있다.

 

전후

 

장바르는 항구 바닥에서 다시 건져올려져, 추축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향해 길에 올랐습니다. 자매함인 리슐리외와 같이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미국에 보내져야 한다고 제안되었지만, 미국과 프랑스 조선기술 사이의 다른 규격으로 인해 이러한 조치가 지연되었습니다.

 

장바르는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카사블랑카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프랑스 해군은 이것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또는 전혀 완성할 가치가 있는지를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전함으로써 유지하기로 결정되었고, 전후 항공기가 주도하는 새로운 해군 교리에 적용하기 위해 더 많은 대공 무장을 추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장 바르는 마침내 1949년 프랑스 해군에 취역한 마지막 전함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항공모함은 함대의 주도권을 전함에게서 빼앗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 함선이 폐기될 때까지 남은 함생동안, 장 바르는 단지 하나의 중요한 전투임무에만 참여했는데, 이는 1956년 프랑스 함대는 2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동안 이집트 정부에 성공적으로 압박을 가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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